 | 모임장소 미팅 → 링슈트라쎄(빈대학, 시청사, 국회의사당, 오페라하우스 등) → 빈 예술사 박물관 → 벨베데레 궁전 박물관
※ 투어 동선 및 순서는 당일날씨, 박물관 예약, 교통편 파업, 변경 등 현지 사정에의해 예고 없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 12월부터 2월까지(3개월간) 겨울철에는 궁전 및 미술관등 실내에서 진행하는 투어에 더욱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 3월~11월 투어코스는 꽃이 피는 따뜻한 시기로 기본투어코스 외에 추가로 Hundertwasser Haus 가 투어코스로 추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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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여행! 그 시작은 비엔나의 중심 링슈트라세를 이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링슈트라쎄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도시의 중심에 링처럼 둘러싼 대로를 따라 역사적인 건물들을 배치함으로서, 비엔나의 대표적인 관광지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오스트리아 자전거나라에서 진행하는 키스투어의 시작은 보다 쉽게 비엔나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담가이드와 함께 안전하게 트램을 탑승하여, 링슈트라세를 중심으로 들어서있는 비엔나의 주요관광지들을 안내 드리며, 입장하게 될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개관설명을 첫 코스로 준비하였습니다. |
미술가이면서 건축가, 평화주의자, 환경운동가 등 여러 수식어를 가진 훈데르트바써. 그는 클림트와 쉴레의 뒤를 이어 total art를 완성한 오스트리아의 자랑거리입니다. 그의 이름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그 스스로 의미를 담아 개명한 것으로, Friedens(프리덴슈)는 ‘풍요롭다’라는 의미를, reich(라이히)는 ‘평화롭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또 Hundertwasser(훈데르트바서)는 ‘100개의 물’이라는 뜻으로 자연주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훈데르트바서는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담아 작품에 표현하였으며 연설과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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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남동쪽에 위치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합스부르크왕가가 1697년 부지를 사들이고 사보이의 왕자 오이겐이 거대한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이후 1714년 건축이 시작되어 틀을 닦고 정원을 만들었으며, 그 주변으로 오랑제리와 그림을 전시하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부 벨베데레 궁전은 1716년에, 상부 벨베데레는 1723년에 완공되었으며, 건축을 맡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는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양식을 극대화한 거장으로 손꼽힙니다. 궁전은 1752년 마리아테레지아 여왕에게 팔려, 그녀가 최초로 이곳을 벨베데레라 명하게 됩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갤러리 박물관이 벨베데레 궁전으로 정해졌으며, 이곳에서 '키스'의 주인공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제자로 활동하여 '가족'이라는 그림을 남긴 에곤쉴레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
<키스>
'황금시대'의 절정을 이루는 클림트의 대표작입니다. 남녀의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클림트의 영혼은 계속 남녀간의 화해를 추구 했고 그 소망을 가장 밀도 있게 담은 작품이 '키스'입니다. 클림트는 남성과 여성을 추상적인 도형장식으로 즐겨 표현했는데 남성의 옷에 표현된 네모난 장식과 여성의 옷에 표현된 타원형 장식이 성별처럼 조화를 이루어 에로스가 제공하는 환희를 더욱 고조시킵니다. |
<가족>
에로틱한 구상작품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미술가입니다. 아르누보 일환인 독일 유켄트스틸 운동과 구스타프 클림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체의 육감성을 딱딱한 선과 강렬한 엑센트로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쉴레는 1918년 클림트의 사망 이후 오스트리아를 이끄는 예술가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며, 그 해 3월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예술적으로, 경제적으로 클림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그 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가족>을 완성합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그의 아내가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그 역시 독감에 감염되어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잃은 지 사흘 만에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
<폭풍우(바람의 신부)>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작가로 심리적 초상화에 뛰어났습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불규칙하고 굴곡이 심한 선, 차갑고 어두운 색채, 강하고 거치 붓 터치로 표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와의 격정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폭풍우(바람의 신부)>는 손꼽히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화가 뿐만 아니라 시인이며 극작가로도 활동한 그는 희곡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을 바룦해 표현주의 연극의 창시자라는 평을 얻기도 했습니다. |
<사악한 엄마들>
스스로 색채분리의 기법을 연구하고, 점표풍의 화법으로 빛의 광선을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의 특징입니다. 벨베데레궁전에는 그의 작품 중 <사악한 엄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세간티니 자신의 유년시절과도 관련이 있다는 이 작품의 신비스런 색채와 그림 속 인물들의 모습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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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 ‘유럽 최고의 컬렉션'이라 알려져있는 미술사(예술사)박물관.. 이집트 고대 문명, 그리스 로마 조각에서부터 중세시대의 종교화, 이후 유럽의 회화, 궁정 공예품, 무기, 갑옷, 동전 등 그 컬렉션의 종류가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수준에 있어서는 단연 세계 최고라고 평가받는 곳입니다. 비엔나 키스투어는 하루의 일정 중 대부분의 시간을 미술관에서 보내며, 미술의 역사로 보는 비엔나를 소개하는 명품투어입니다. |
빛으로 그려낸 일상의 기적
베르메르는 영혼과 평화, 빛의 화가였습니다. 그는 짧은 생애를 델프트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마을 여인숙의 주인이자 미술상으로 일하며 대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베르메르는 많은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지만, 초기 작품에서부터 이미 베르메르 특유의 섬세한 솜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답니다. 빈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된 이 유명한 걸작은 짧았던 베르메르의 활동기간 중 말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요함, 집중, 형이상학적이고 순수한 이미지가 정제된 분위기로 인해 더욱 두드러집니다. 정제된 분위기는 색채와 텅 빈 공간 사이를 오가는 이상적인 구도 안에서 각 요소들이 완벽하게 배열되면서 만들어집니다. 이 위대한 작품은 죽음을 앞둔 화가의 일종의 ‘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인생의 영원한 회전목마 대 피테르브뢰겔은 역사적으로 파란만장했던 시기에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매우 적으며 그의 전기를 완전하게 재구성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브뢰겔은 서명과 날짜를 작품에 기입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회화, 드로잉, 판화 작품들에 대해 신뢰할 만한 연대표를 작성 할 수 있습니다. 브뢰겔은 시골 장터와 결혼식의 흥청망청을 비판하곤 했습니다. 그의 그림을 잘 보고 있으면 왠지 비밀스러워 보이는 남자(브뢰겔로 추정)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띤 채 어딘지 빈정대는 듯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술사박물관에 오신다면 브뢰겔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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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가의 괴짜 궁정화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출신의 이 화가는 연금술과 과학실험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황제를 신화 속의 신 포르툼누스의 모습으로 그리는 등 자기 고유의 화법을 지니고 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사랑받던 화가였습니다. 화가는 꽃과 과일로 황제의 머리를 독창적으로 표현하곤 했었습니다. 당 미술사박물관에서는 쥬세페아르침볼도의 사계절 시리즈와 우주를 이루는 네 가지 원소인 물, 불, 흙, 공기를 네 장의 초상화를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마치 현대회화작품을 보는 것과 같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아르침볼도의 작품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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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꾸밈없는 생생함 미국에서는 그림을 썩 잘 그리는 사람을 가리켜 종종 ‘진짜 렘브란트 같구나(You'e a real Rembrandt!) 라고 말합니다. 렘브란트의 명성이 뛰어난 솜씨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술사에서 렘브란트가 차지하는 입지는 독보적이며, 그에 필적할 만한 색채화가는 많지 않습니다. 또 그만한 삶의 깊이와 영적인 심오함을 지닌 화가를 찾기란 힘들지요. 그는 뒤러, 루벤스, 크라나흐 등과 함께 종교화의 위대한 한 명으로 손꼽히는 작가입니다. 이런 사람이 화려한 색채구사나 능숙한 솜씨를 남용하지 않고 소탈하고 예사롭게 그림을 그렸다면 믿어지시나요? '가장 꾸밈없는 생생함' 이것은 렘브란트가 말한 자신의 조형의 특징이자 덕목입니다.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이 화가는 현란한 장인적 기량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실성만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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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회화의 감각적인 즐거움 17세기 초, 페터 파울 루벤스는 유럽 무대에 혜성 같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대가들의 그림을 공부한 뒤,1608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그림은 열정적이고 활기가 넘쳤습니다. 루벤스는 가능한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크기에 도전하면서 그림을 즐겼고, 캔버스의 안료 사용에 몰두하였습니다. 그의 공방은 100명이 넘는 조수들을 동원해 방대한 작품을 생산해냈으며, 전 유럽으로 작품을 수출하였습니다. 루벤스는 1620년과 1640년 사이,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였고 그에게는 주문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의 주요 활동무대는 자신의 고향인 안트웨르펜이었지만, 로마 파리 런던에서도 작업을 하였습니다. 루벤스는 당대 군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한 대가들과 비슷합니다. 루벤스의 값비싸고 관능적인 그림들은 왕실 소장품이 되었으며, 수집가들은 그의 작품을 손에 넣고자 애를 쓰곤 했습니다. |
우울한 스페인의 광휘 속에 나타난 색채의 천재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동시대의 위대한 문학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뛰어넘는 감정, 상황, 인물들을 담으면서 동시에 당대의 삶과 정치를 효과적으로 그려냄으로서 17세기 전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활발한 문화적 풍토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일찍부터 그는 정물 요소가 가미된 일상생활을 주제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구성, 빛, 그림자의 유희에 있어서 카라바조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1623년 펠리페4세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각료이자 세비야 출신인 올리바레스 백작은 벨라스케스를 마드리드로 불러들여 왕의 공식화가로 임명하였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왕궁을 장식하기 위한 거대한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왕과 왕자들, 난장이와 어릿광대를 그린 수많은 초상화들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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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선물인 영원한 젊음
라파엘로는몬테펠트로 가문의 영향 아래에 있던 이탈리아 우르비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훌륭한 화가이자 지성인이었던 조반니산티의 아들로,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국제적인 조형 교육을 받았는데, 감정, 빛, 인상학뿐만 아니라 공간표현의 문제까지 두루 연마하였습니다. 라파엘로는 가장 일반적인 주제인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진정으로 감동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라파엘로의 성모 마리아는 최소한의 동작, 미묘한 미소, 매력과 부드러움의 결정체입니다. 성모자를 그린 그림을 보면 인물의 위치, 풍경, 상황, 빛 등을 화가가 얼마나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빈손으로 출발해 거장이 되기까지: 어느 천재의 오디세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 메리지는 그의 마을의 이름을 따 ‘카라바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39년이라는 짧은 생애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내며 미술의 흐름을 급격하게 변화시켰습니다. 카라바조 작품의 가장 혁신적인 특징은 일상생활로부터 직접 이끌어낸 열정적이고 생생한 시적 사실주의였습니다. 그는 초기 작품들에서 개구쟁이들, 협잡꾼들, 집시들, 그 밖에 온갖 종류의 불량스러운 인물들을 묘사하였으며, 그러한 작품들이 갖는 신선한 요소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유사한 작품들을 낳게 됩니다. 처음에 카라바조의 그림은 카톨릭의 교리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물의를 일으켰고, 실제 삶에 지나치게 가깝다고 여겨져서 거부되기도 했으나 로마 교회들은 점차 회화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카라바조의 작품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나 나는 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뒤러는 한없이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시대를 선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군주, 예술가, 사상가와 교제하였고 당대의 논의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습니다. 19세의 나이에 도제훈련을 마친 그는 바젤, 빈, 베네치아 등을 여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조형미술에 대한 유럽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다른 화가들이 여전히 전문화된 장인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때에, 그는 카리스마와 날카로운 자의식을 통해 신념이 있는 지성인으로 칭송받습니다. 뒤러는 경이로운 창조력을 지녔으며 다양한 주제, 형식, 기법을 받아들인 진정으로 다재다능한 예술가였습니다. |
“화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세 가지 색, 즉 흰색, 빨강색, 검은색을 잘 알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긴 생애동안 티치아노는 독창성과 뛰어난 색채사용으로 회화를 지배하였습니다. 조반니벨리니의 제자인 그는 조르조네와도 작업하였으나, 1515년경에는 명백한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이 되어 지식인들의 찬사를 들었고 소장가들의 찬미를 받았으며 귀족이나 궁정의 부름을 점점 더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1520년대에 그의 명성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베네치아를 넘어 전 유럽에서 각광받는 초상화가로서 입지를 세웠습니다. 티치아노는 르네상스 미술의 사회적,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었고 많은 점에서 근대 회화의 설립자로 볼 수 있습니다. 신화적, 고전적 장면에 대한 해석은 화가로서의 재능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심오하고 시적인 탐구를 잘 보여줍니다. |
관찰자의 정확한 눈과 견실한 손
홀바인은 헨리 8세 궁정과 귀족을 위한 초상화가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모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상징물과 내면에 대한 통찰력을 감탄할 만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홀바인은 심리적인 통찰력과 조각 같은 인물상, 사실적인 정확함으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균형잡힌 자질을 지닌 뛰어난 초상화가가 되었습니다. |
“우리 화가들은 시인들과 미치광이들이 가진 것과 동일한 허가증을 지니고 있다.”
베로네제는 종교재판소가 그가 1578년에 제작한 <최후의 만찬>에 50명이 넘는 인물을 그려 넣은 이유를 설명하라며 소환하자 위와 같은 대답으로 창작의 자유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주제라도 축제의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문학적 주제, 심오한 알레고리, 제단화 그리고 최후의 만찬 같은 주제는 인생과 예술의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아름다움고 우아함의 만남
그는 풍요롭고 찬란한 아름다움과 지적인 우아함을 조화롭게 표현했습니다. 조숙한 재능이 넘치는 파르미쟈니노의 작품은 막 시작된 매너리즘의 세련된 형태를 보여줍니다. 파르미쟈니노는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현재 빈에 소장되어 있는 이 뛰어난 자화상을 제작하였습니다. 대가다운 놀라운 솜씨로 볼록거울 속에 반사된 얼굴과 손, 방의 왜곡된 형태를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
22 | <미술사박물관>안드레아만테냐<성 세바스챤> | |
그리스어로 서명한 궁정화가
미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만테냐는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공부하는 행운을 얻었는데 당시 이 도시에는 도나텔로, 파올로우첼로와 같은 토스카나의 거장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만테냐는 일찌감치 ‘시대를 앞서가는' 재능을 보였고, 원급법의 새로운 발견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만테냐는 궁정의 미술을 화려하고 환상적인 후기 고딕양식에서 고고학과 원근법을 강조하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빠르게 변화시켰습니다. 조반니벨리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만테냐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색조 변화를 표현하는 스푸마토 기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투명하고 오차 없는 시각적 정확함을 지켰습니다. |
독일 회화의 선두주자
도나우파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 1505년에 대 루카스크라나흐는 작센의 선제후인 프레데릭의 초청을 받아 비텐베르크로 갑니다. 실제로 그는 약 50년 후에 사망할 때까지 작센 궁정을 위해 일했으며, 독일 르네상스 시기에 가장 오래 살면서 활발하게 활동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양식은 전설적인 표현의 초기작품에서 지적이고 장식적이며 추상에 가까운 특성을 보이는 후기작품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을 독일식으로 수용하였다고 평가됩니다. |
궁금한 점이나 함께 토론하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댓글 또는 방명록에 남겨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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